해녀 (허핑턴포스트 기고 예정)
뉴질랜드의 친구를 통해 알게된 한 친구의 부탁으로 해녀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
글로벌 여성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구는 '여성의 경제활동'이란 주제로 이니셔티브를 쓰고 싶다고 했다.
여러가지 주제가 있었고 그 중에 해녀글은 제주 출신인 내가 써보면 더 좋을것 같다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써보게된 글.. 공유함니당. 기고용 글은 처음 써보는데 역시 쉽지 않군요!
해녀.
글을 쓰기 위해 ‘해녀’라는 단어를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니, 우리말에서 이렇게 여성이 주체적인 의미를 갖는 직업이름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을 나타내는 명사의 대부분이 남성중심인 우리말에서, 그런 직업을 갖고 있는 여성에겐 직업이름 앞에 여성을 나타내는 ‘여’ 자를 붙인다. 예를 들면, 여선생, 여학생, 여가수, 여경(찰), 여군(인), 여배우 등이 이 경우에 해당되는데 그 예외를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오히려 해녀 일을 하는 남자를 해남이라고 부르니 위 경우와 정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해녀는 이름 그대로 바다에서 일하는 여성들이다. 산소통도 없이 맨몸으로 10m~20m 깊이의 바닷속으로 들어가 성게, 소라, 전복, 미역, 톳 등을 채취하는데 이를 ‘물질’이라 한다. 고무로 만든 검정색 잠수복을 입고 ‘눈’이라 불리는 물안경을 쓴다. 손에는 해산물을 담을 그물모양의 ‘망사리’와 물질 중간에 몸을 의지해 쉬기 위한 스티로폼으로 만든 ‘테왁’ 그리고 해산물을 돌에서 떼어낼 막대기 모양의 ‘빗창’ 등을 채비한다. 해녀는 주로 우리나라 남부지방 일부와 제주도에서 활동 하는데 약 만 명의 해녀 중 절반 정도가 제주해녀라고 한다.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제주 토박이다. 부모님 두분 모두 제주 동쪽 해안마을에서 나고 자라셨고, 할머니 두분 모두 해녀 일을 하셨다. 당신들께서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물질을 그만두셨지만,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고 당신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며 자라왔기 때문에 제주 해녀 문화에 대해선 익숙함을 느낀다.
내가 바라본 해녀는 제주 사회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땅이 아주 척박해 먹고 살기 힘들었던 제주에서 해녀들은 제주의 지역경제를 이끌었다. 일제시대를 거쳐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일본으로 말똥성게 등 해산물을 수출하기도 하며 지역경제에 공헌이 아주 컸다. 그 이후 해녀의 숫자 감소로 지역경제 공헌도는 낮아졌지만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수입이 크게 부족하지 않았다. 우리 할머니께서도 결혼을 하기 전까지 물질을 하며 가정수입에 큰 몫을 담당하셨다. 당신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여느 여학생들과 같이 중학교 진학대신 물질을 배우기 시작하셨다. 당시 사회분위기 상 여자들은 밭일과 물질을 통해 돈을 벌어야 했고, 그 돈으로 남자 형제들의 공부를 책임져야 했다. 우리 할머니께서도 오빠와 남동생을 대학까지 공부시키기 위해 제주에서뿐만 아니라 부산에 까지 가셔서 ‘출가해녀’ 생활을 하기도 하셨다. 이처럼 제주에서 해녀로 대표되는 여성의 존재감과 역할은 다른 지역에 비해 두드러진다.
그리고 해녀문화는 제주 공동체 문화의 원천이다. 나는 제주도의 한 부속 섬에서 지내며 가까이서 이를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대략 2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이 섬엔 여성 분들의 대부분이 해녀 일을 업으로 하고 계셨다. 거친 바다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했고, 제주에서는 마을 마다 ‘어촌계’를 중심으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이 공동체 안에는 잠수 실력을 기준으로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뉘는 계급이 있는데, 이는 바닷속이 위험을 예측할 수 없는 곳이기에 본인 실력에 맞는 수심에서 작업을 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몇 시간 동안의 물질이 끝나 뭍으로 나오면 실력이 좋고 젊은 해녀들이 나이든 해녀들에게 수확한 해산물을 나누어 준다. 또 뭍 근처에 해산물을 풀어놓고 ‘할망바당’을 따로 만들어 나이가 들어 깊은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해녀들을 배려한다. 이것이 제주 해녀의 ‘수눌음’이라 불리는 문화인데, 제주 공동체 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해녀 일은 아주 고된 일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께서 두통약을 꺼내 드시는걸 자주 봐왔다. 오랜 시간 동안 깊은 바다에서 수압을 견뎌내며 항상 두통에 시달리셨기 때문이었다. 또 산소통 없이 숨을 참으며 물속으로 들어가는 ‘나잠어법’을 이용하기 때문에, 물속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오죽하면 해녀 일을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가족을 먹이는’일이라고 할까. 이처럼 어릴 적 꿈을 키우는 것은 사치라고 여겼던 할머니께서는 한 평생 그렇게 가족을 위해 희생을 감내해야만 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딸들은 절대 물질을 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하셨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산업화와 현대화를 거치면서 제주여성들은 힘들고 위험한 해녀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해녀의 수는 줄고 줄어 한때 2만명을 웃돌았던 제주해녀의 수가 5천명 미만으로 줄었다. 해녀의 수 감소와 더불어 해녀의 고령화도 심화되었는데, 제주해녀의 약 60%가 70세 이상의 고령이라고 한다. 실제로 제주에 살면서 나이가 젊은 해녀를 본 기억이 없다. 해녀라는 단어를 들으면 머리 속에 연상되는 이미지는 ‘검정색 고무 옷을 입고 있는 할머니’일 정도로 해녀는 고령화된 직업이 되었다.
이렇게 제주의 경제와 문화를 이끌었던 해녀는 멀지 않은 미래에 ‘과거에 존재했던 직업’이 될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 제주사회는 해녀의 ‘수를 늘리는 일’과 ‘해녀문화를 기억’하는 노력을 동시에 기울이고 있다. 해녀학교를 설립해 젊은 세대가 물질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게 하고, 해녀박물관을 통해 해녀의 의의를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은퇴한 해녀들을 고용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해녀 옷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기도 하는 사회적 기업의 형태로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들게 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해녀들은 물 밖으로 나오면서 물속에서 참았던 숨을 터뜨리듯 내쉬는데, 이를 ‘숨비소리’라고 한다. 이 소리로 표현되는 그녀들의 희생정신, 애환, 사랑을 기억하는 노력을 이어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