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장 안의 글쟁이들
유득공의 마음 속에는 본문
그가 걸어오는 모습은 멀리서도 잘 보였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은
도포자락이 저절로 바람에 휘날리고
밝고 부드러운 표정은 햇살과 잘 어울려
주변까지 혼자 온통 환하게 했다.
어려서부터 별로 터울이 지지 않는 숙부들과 형제처럼
함께 자라서 그런지 어느 누구와도 웃는 얼굴로
잘 어울려 지냈다.
큰 키에 단정한 얼굴 생김새가 남자로서는 드물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늘 밝게 웃고 있어서 더욱 보기 좋았다.
마음이 울적하고 괴로운 일이 생기면
나와 벗들은 유득공을 자주 찾았다.
책을 팔아 양식을 얻었다는 부끄러움으로
내가 괴로워 할 때도 가장 먼저 찾은 벗이었다.
그에게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해주는
독특한 기운이 있었다.
언젠가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박제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유득공의 마음 속에는 우물 하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근심 걱정도 한번 담갔다 하면 사뿐하게 걸러줘
밝은 웃음으로 올라오게 하는 우물 말입니다."
정말 그의 가슴 속에는 근심 걱정을 담갔다 걸러내는
우물 하나가 있는 것일까.
심각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짝 들어 올리는
그의 우스개 소리는
그 우물에서 튕겨 올라온 시원한 물방울일까.
그 물방울이 우리에게도 튕겨져 시원하고 명랑한 기분에
온몸이 젖어 유쾌해 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의 마음 속에 고인 물은 끝도 없이 깊고 올려도 조금도 마르는 법이 없어
늘 새롭고 싱그러우니 말이다.
유득공은 나보다 7살 아래고 박제가는 9살 아래다.
두살 터울인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생일이 음력 11월 5일로 같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삯바느질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것도 외아들이라는 점도 같다.
우리 모두가 그랬듯이 서자의 신분이란 처지도 같다.
그러나 유독 그의 얼굴에서는
우리와 같은 그늘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함께 있으면 유득공의 얼굴은 유달리 눈에 띄었다.
일찍부터 잔주름이 많은 내 얼굴은 늘 까칠했다.
박제가는 얼굴빛 만큼은 희었어도
짙은 눈썹의 그림자 때문인지
어두운 그늘이 항상 드리워져 있었다.
늘 웃음이 떠나지 않는 유득공의 얼굴만이
우리들 가운데서 환하게 도드라졌다.
-이덕무(청장관전서 중에서)
유득공의 마음에 다녀온 듯, 읽을 때마다
기분 맑아지는 소중한 글 공유합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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