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장 안의 글쟁이들
자기 부끄러움과 소설질에 대하여 본문
나는 때로 소설을 쓰는 일이 '젖은 속옷 제 몸 말리기' 같다는 느낌을 갖곤 한다. 그리고 그 기분 찜찜한 노릇이 어쩌면 소설장이의 숙명처럼도 여겨진다. 어떤 처지에선가 젖은 속옷에 겉옷을 가려 입은 채, 그 속옷을 자신의 체온으로 기다려 말린 일을 경험해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기분 찜찜하고 부끄러운 노릇이며 힘든 인내가 필요한 일인가를 생생한 체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젖은 속옷 말리기야말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힘든 인내로써 남모르게 혼자 감내해 내려는 가상스런 노력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대체 어찌하여 내가 그런 젖은 옷을 속에 감춰 입게 된 것인지 연유를 모른다. 나의 삶에 그런 괴로운 부끄러움이 깃들어 오게 된 연유를 모른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조상들의 빈궁한 삶에서거나 어떤 역설적인 덕목의 유전으로, 아니면 저 정의의 지사나 탈속의 도사들을 꿈조차 꾸어볼 수 없는 나의 무능과 무기력에서 연유된 것 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다만 그 젖은 속옷을 대명천지에 벗어내 놓고 시원하게 말려 입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남모르게 내게 생긴 나 자신의 부끄러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에 드러내 놓았다가는 그 부끄러움을 옳게 감당해 나갈 기회조차도 영영 잃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내가 소설을 쓰는 일에도 그만큼 괴롭고 은밀스런 참을성이 끈질기게 요구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20년 가까운 소설질 동안에 나의 속옷을 자신의 체온으로 얼마나 정결하게 말려낼 수 있었으며, 나의 삶에 깃든 숙명의 부끄러움을 과연 어느 만큼이나 줄일 수 있었던가. 성과는 시종 한심스러운 것이었다. 옷이 마르고 부끄러움이 줄기커녕 날이 갈수록 새로운 습기가 옷 속으로 점점 더 젖어 들어오고, 심신은 그만큼 축축한 속옷깃에 칠칠 휘감기고 있는 느낌인 것이다. 하물며 그런 내가 나의 소설질로 남의 속옷을 말려주려 나섬은 내 속옷이 먼저 웃을 일일 것이다.
한때 어떤 유럽 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 사람이 개고기를 먹는다고 항의와 데모로 법석을 떨어댄 일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소련의 핵탄두를 유럽에서 극동 쪽으로 옮겨 배치하는 일에 대해서는 일체 입들을 다물고 있었다. 이건 아무래도 자기 부끄러움을 모르는 몰염치한 짓거리다. 그리고 저들의 그러한 주장이 인간의 도덕성에 근거한 것이라 우긴다면, 그것은 저들의 신념에 비례해서 더욱더 거짓되고 큰 부끄러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조차도 아닌 사회 공의와 신념의 이름으로 팔아치우는 일이며, 거기에 굉장한 깃발까지 앞세우고 나선다면 그것은 이미 부끄러움으로 남을 수 없는 해괴한 몰염치의 광태일 것이다.
바라기는 자신만이라도 자신의 소설과의 정직하고 화창한 화해 속에 있고 싶다. 그런데 그것이 좀처럼 어렵다.
오히려 상호 간의 불신과 모멸감으로 돌이킬 수 없는 불화만 더해 가는 느낌이다. 근 20년간의 소설 작업 속에 숨은 습기가 조금도 마를 수 없었던 것이 그 좋은 증거일 것이다. 나의 부끄러움이 자신과의 화해를 방해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소설쓰기로써 나의 속옷의 부끄러움을 감내하려는 노력이나, 소설과 자신과의 작은 화해나마 시도를 그만 단념해야 할 것인가... ... 이제까지 써온 모든 소설들을 나의 부끄러움의 이름으로 뒤에 버려 남겨두고 거기서 떠나는 일. 그 부끄러움에게 자신을 온통 비워 넘겨주고 허허하게 거기서 떠나버리는 일- 그것이 어쩌면 내겐 차라리 자신과의 화해에 이르는 길일지 모른다. 사람들이 흔히 제 땅을 떠나서야 고향을 생각하고 그 땅과의 화해에 이르듯이 말이다. 비우고 떠남은 새로운 채움에의 길일지 모른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아마도 나는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내게는 실상 소설질로밖에는 자신과의 화해를 도모해 볼 다른 길이 없어왔고, 그 자신과 자신의 소설과의 우선적인 화해는 다른 모든 이웃이나 세상과의 화해의 허심탄회한 기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모든 이웃들 또한 나름대로 각기 자기 몫의 젖은 옷을 갖춰 입고 괴로운 인내 속에 안팎의 화해를 꾀해 나가고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젖은 속옷의 부끄러움- 그것이 영원한 죄닦음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인간 공동의 숙명의 짐이자 나의 살과 소설질의 원의적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되풀이돼 온 나의 화해에 대한 끊임없는 도로는 자신을 비우고 떠날 수 없음에 그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니라. 허물은 오히려 마를 수 없는 속옷이 정결스럽게 마르기를 조급하게 기다리고 줄어들 수 없는 부끄러움을 당당하게 쓸어 벗어던지려는 당찮은 소망에 있었을지 모른다.
젖은 속옷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다. 그것은 일거에 벗어던질 수도 없거니와 그것이 우리들의 숙명인 이상에 부끄러움도 또한 끝내 줄어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길은 한 가지 뿐이다. 그 부끄러움을 자기 삶의 일부로 정직하게 수락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한 본질로서 귀속시키는 일이다. 그 척척한 속옷의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자기 삶의 일부이자 필생의 몫으로 혼자서 은밀히 감내해 나가려는 고통과 인내를 감수없이는 나는 아마도 끊임없이 젖어드는 새로운 부끄러움으로 하여 부끄러움 자체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의 소설은 그 자신의 부끄러움을 파는 뻔뻔스러운 장사판이 되고 말 것이다. 자기 부끄러움에의 허심탄회한 귀의, 그리고 그 부끄러움과의 아프고 은밀스런 화해, 그것이 비록 삶의 일반적인 도덕성에 상처를 줄지도 모르지만, 내겐 그러나 그것이 가장 정직하고 유일한 자기 화해의 길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기 부끄러움과의 부끄럽고 부끄러운 화해를 통하여 나의 이웃과 이웃들의 부끄러움과도 그런대로 따뜻한 위로와 화해의 작은 통로가 마련되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소설질의 새로운 출발점이자 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84.9)
- 이청준, "자기 부끄러움과 소설질에 대하여", 『벌레 이야기』, 열림원, 2002, p4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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