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장 안의 글쟁이들
나를 만나는 홀로여행기 본문
[나를 만나러 떠나는 홀로여행기]
지난 6월 5일,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을 혼자 돌아다녔어요.
아라동 - 서귀포 보목항(말고기버거 푸드트럭) -
서귀포 시내 - 성 이시돌 목장 - 제주시외버스터미널
이렇게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나의 소리에서 조금 떨어져보고자 걷고 걸었지요.
사람과 살냄새 풍기며 같이 있는 것도 좋을 때가 있지만
온전히 나 혼자 다니는 여행은 나의 감각을 소중히 여기고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기회가 되는 것 같아
종종 이렇게 다니곤 해요.
돌아다니며 눈에 들어왔던 풍경들,
갑자기 영감을 받아 써내린 글들 하나씩 풀어내릴게요.
#1
산등성이를 깎아 만든 길을 꾸불꾸불 지나는 버스 안은
먹 가는 냄새가 풀풀 풍기는게,
외할아버지 생각이 나게 한다.
서귀포 보목항 부근 바닷가 돌담집.
#2
오늘은 눌러왔던 모든 감정들에 유예를 주고 싶다.
짜증, 갈망, 분노, 슬픔-
완전히 드러나버릴까 두려워 허겁지겁 주워담아야 했던
모든 질척거리는 감정들에게
머물러도 좋다는 오늘의 유예를 주겠다.
해맑은 밝음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있는 줄도 몰랐던 어두운 감정들을
오늘만은 마음껏 마룻바닥에 늘어놓아도 좋도록
허락해 주고 싶다.
(긍정, 희망, 낙관이 결론에 있어야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인지라 평소에 출퇴근할때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내 감정을
억누른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어요.
이 날도 즐거운 마음으로 떠났는데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 지난 일들이 생각나 머리가 좀 아팠어요.
의무가 사라지고 여유가 찾아오면
꼭 끈적거리는 찌꺼기들이 일어나더라구요.
그 때 억제하지 않고 마음껏 바닥까지 비워내보자
라는 마음으로 썼던 글이예요.)
#3
친구와 가까워진다는 건
또 다른 연인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서로 닮아있다고 생각했던 와중에
각자의 다른 세계를 만나고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순간
친구의 낯선 모습을 맞닥뜨린다.
#4
혼자 다니는 여행의 좋은 점은
시작 지점부터 끝날 때까지
온전히 나를 위해 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음악 선곡부터 이동시간-
어디서 얼마나 멈추고 다시 걸어갈 것인지에 대해
복잡한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짤 수 있다는 것.
나를 위해 충전하는 시간을 가져야
타인과 '진심으로' 통하는 순간을 만날 수 있다.
#5
누군가와 좋은 장소, 감정을 나누고 싶은 마음을
잠시 멈추고
오직 나에게로, 나에게로 걸어가보는 길.
나에게로, 나에게로, 지독히 나에게로.
#6
우리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해야하는 마음의 숙제가 있다.
치열하게 나를 살아내는 것.
#7
푸드트럭 오픈시간에 맞춰 도착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낸다.
재미있는 건, 모두 비슷한 잡지라도 본 것처럼
은은한 톤의 옷과 신발을 신고 있다는 것이다.
나름 hip스러운 사람들이 SNS를 타고 같은 장소에 모여
입을 우물거리다 다시 각자의 목적지로 떠난다.
#8
쓰지 않은 청경채,
아삭아삭한 양파,
잘게 다진 소고기에
해바라기 씨앗이 콕 박힌 번까지
바다를 보면서 앙!
우악스럽게 한 입 먹는다.
마늘소고기 버거를 한 손에 쥐고
한 손으로는 허겁지겁 글쓰기.
#9
러프한 옛날음악을 좋아하면서도
새로 나온 신보 앨범을 꼭 챙겨듣는 이유는
세계가 어떤 흐름으로 변하고 있는지
몸에 감각으로 새기게 되기 때문이다.
비트는 어떤 풍이 유행하고
가사는 어떤 단어로 채워지는지,
뮤직비디오는 어떤 성향의 영상과 색감으로 완성되는지
알게 되면서
유행하는 풍의 오만에 갇히게 되기도 하지만
'한 때'의 추억팔이에 머물지 않고
과거와 지금의 순환고리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빠질 수 없는 인증샷
바닷가에서 보목항으로 돌아가는 길.
#10
어진아~ 하고 엄마는 불렀다.
몽롱하게 엄마를 쳐다보면 엄마는 나를 덥썩 안아줬다.
푸근한 우유색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면
갓난아기도 아닌데 젖냄새와 살냄새가 폴폴 올라와
아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잠결에 목이 타 "물..엄마 물.." 하고 가느다랗게 외치면
내의바람으로 어기적 어기적 일어나
국그릇에 물을 떠다주던 엄마는
이제 어진이가 되었다.
(보목항에서 서귀포 도심으로 들어가는 버스 안에서 문득 엄마 생각이 나더라구요.
시간이 가면서 건강이 조금씩 약해진 엄마도 어릴때에는 진짜 나의 '엄마'였었는데,
어느새 건강하기만 하면 다행인 지금을 보내고 있는지라
가끔 잊어버리고 있었던 엄마의 기운찬 모습을 기억 속에서 발견하면 '있었던 일인가..?' 하고 곱씹게 돼요.
엄마가 더 오래오래 제가 결혼해서 아이 낳을 때까지 같이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보목항에서의 힐링을 마치고 창천리 정류장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성 이시돌 목장으로 향했어요.
이시돌 삼거리에 있는 장승들.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던 삼거리.
'이시돌' 이름으로 가득찬 구역 도착! 모든게 이시돌 이시돌
가까이 가면 엄청 클텐데,
멀리서 보면 꼬마 장난감같은 트랙터.
계속 이런 풍경의 연속.
바다를 볼때 보다도 이런 풍경에 마음이 녹아내린다구요 하아아
옹동이 내밀고 사이좋게 여물 먹는 말들.
말을 보면 마음이 설레요.
강인하면서 온순해 보이기도 하고,
마음을 주지 않은 상대에게는
도도하게 굴기도 하고-
몸을 만지면 내 몸이 데워질 정도로 뜨뜻-하고.
말 같은 친구가 있으면 늘 든든할 것 같은.
기린, 고래, 말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걷고 걸어 이시돌 목장에서
안으로 지나고 또 지나다 보니....!
볏집을 마시멜로처럼 돌돌 말아 여기저기 툭, 툭.
아..... 가도 가도 이 풍경이 나오는데 말로 표현
다 못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가 뜨거워졌다가-
귀에 꽂았던 이어폰도 빼고 새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홀린 듯이 보고 또 봤어요.
보리밭 주인이 되고 싶다던 친구.
나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면 목장 주인이 되고 싶다.....!
그리고 이시돌 갔으면 빠트리면 안될 것 같았던 테쉬폰.
뒤에는 개장을 앞둔 '우유부단' 매장이 한창
청소와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프레임 안의 프레임을 좋아하는 프레임 덕후 호홍
각각의 선들이 저 창으로 집결되는 것 같은 느낌에 좋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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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벅찬 느낌을 가득 담고
시외버스터미널 뒷쪽에 있는 카페로.
평소 눈여겨보기만 하고 가지 못했는데, 핀란드를 테마로 해서 깔끔하고 무민 천국이었던 곳.
여행일지를 써야 마무리되지!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내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가려는데 문득 마주친 벽.
혼자 괜히 감동받아 사진!
여러분도 혼자 떠나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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